부모님 다음으로 외국에 자주 있는 날 항상 걱정해주시는 이모가 그러셨다.
좁거나 한 집에서 고생 할 바에야,
차라리 투자한다는 마음으로 더 좋은 집에 살 수 있게
도움이 필요하면 이왕 쓰는 거 기분좋게, 언제든 말하라고 하셨다.
샌프란시스코의 집 시세가 우리 이모 잘못도 아닌데 매번 난
대개 이 얘기가 나오면 볼멘소리로 에둘러 화를 내곤 했다.
제일 물가가 비싼 지역 중 하나인 이곳으로 오겠다는 선택을 한 것도 나 자신인데 말이다.
한국에서의 원룸같이, 10만원, 20만원 더 주고
그만큼 더 좋은 집 살 수 있는 쉬운 그런 상황이 여긴 아니라면서.
내가 어엿한 직장에 취업해 멀끔한 보금자리를 구할 수 없는 게 화가 났던건지,
말도 안 돼는 집세에 갑갑한 마당에
일정 정도 이상 더 지불하는건 정말 의미없는 일 같아서 스트레스를 숨기지 못했었다.
이미 운 좋게 구한 삼인실을 나눠쓰면서도 혼자서 매월 100~ 120만원 정도를 내야 하는 마당에
굳이 개인 방이나 스튜디오를 쓰고자 매월 이삼백만원을 지출하는 것은, 내 옵션에 없었다.
'조금 더 내고, 조금 더 잘 사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택권이 없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렇게 작년 여름부터 올해 봄까지 약 8개월정도를 삼인실에서 살았다.
룸메가 나가고 새로 입주하는 동안에는 때로 2인실같이 쓰기도 하고,
3인 만실이 되고 나선 붐비는 큰 방 안에서 산지 오래다,.
외국에서 혼자 사는것도 어려운데, 같은 방에서 여럿이 살기란 보통 일이 아닌 건 당연했다.
시간이 지나고 시세에 대한 감이 잡히면서는
운이 좋으면 사실 150만원정도 가격으로도 괜찮은 1인실을 구하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걸
언제부터 알게 되었지만, 이미 한결 적응해버린 동네와 방을 떠나기가 사실 두렵고 귀찮았다.
'더 내고 더 잘 사는' 투자전략으로 월세는 어떻게 해보겠지만 막상
입주와 동시에 내야 하는 월세 만큼의 보증금, 운 나쁘면 막달 월세도 둘셋 도합해 낼 생각을 하면,
지긋지긋하더라도 이미 계약 후 다달이 월세만 내고 있는 집에서 사는게 더 편한 일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월이 되었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3월 초반에 계속해서 친구를 데려오는 룸메이트와 충돌이 생겼고, 평소 어른스럽던 다른 룸메이트도
코로나바이러스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같은 방에서 사는 것이 전 같지 않았다.
진작에 3월 말에 나오려고 다른 방을 여럿 봐두며 집주인, 서브릿터들과 연락을 했지만,
엄격하게 집 계약을 관리하는 매니지먼트때문에 어김없이 위약금을 낼 수 없어 3월 말까지 고통받을 것만 같던 무렵,
여러 이메일 주고받음 끝에 매니지먼트에서 관리하는 다른 방으로 이사를 허락받았다.
표면적인 이야기는 이러하다.
돈 문제, 같이 사는 사람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우여곡절 끝에 집을 옮겼다는 내용.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여기부터 시작이다.
친구의 다른 친구의 도움으로 우버 두세번으로 옮기기는 버거울,
8개월동안 불어난 짐들을 밴으로 나르면서
새어나오는 미소를 멈출 수 없었다. 폴짝폴짝 뛰고 싶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지내기 힘들었던 숙소에서 나가는 것만큼 더 후련한 일도 없는데,
친구들이 짐을 옮겨주고 돌아간 후 홀로 짐을 정리하는 방 안에서
침대에 누워보다가, 짐을 정리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문득 생각이 든 생각은 이렇다.
'내 방에서 경험할 수 있는 '평화', 이런 느낌이었지!'
Peace of mind.
어느 날, 집 밖에서 힘든 하루를 보냈다면,
방으로 슥 들어와 내 공간 안에서 긴장한 몸을 조용히 녹이는 느낌.
시간이 늦어져도 켜 둘 수 있는 조명등의 자유가 얼마나 조용히 짜릿했던가.
눈치를 보지 않고 언제든 맞출 수 있는 알람시간 세팅의 즐거움.
음악을 듣다 신이 나면 내 방에서 춤을 춰도, 아무 문제가 없다.
미소를 띄고 이불 안에서 꼼지락대면서 다음 하루를 준비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 모든것을 놀랄 만큼이나 잊고 있었다.
룸메이트가 두명이나 되는 바람에, 서로 기상시간이 달라
아침마다 잠결에 두세번 이상 깨는 것은 기본에다가 인상쓰며 하루를 시작하곤
잘 때는 새벽 두세시까지 룸메이트의 코골이와 씨름하며 지쳐 잠들곤 했는데.
이젠
침대가 너무 편해서, 내 공간이 너무 좋아서만으로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띄고 잠에 들 수가 있다니.
이불 양 편을 살포시 쥐고 목까지 끌어올려 다음 하루를 기대하는 좋은 기분, 잊고 있었다.
해외생활을 하며 배우는 것은, 이렇게 해당 고유의 공간에 대한 즐거움을 넘어
한국에서, 그간 가족들의 울타리 안에서 받았던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것들이었는지 되새길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모 말씀이 맞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
말도 안 돼는 가격이더라도 어쩌면 감수해야 하는 것은,
내가 눈 떠서부터 눈을 붙이기 전까지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 지가 우리의 하루를 크게 좌우하고
결국 그 하루들이 인생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때론 인생의 다른 부분들이 인생의 진행 방향을 순서를 바꿔 가며 크게 좌우한다.
이번 내 경우는, 주거공간의 변화 및 개선으로 식습관 및 운동습관, 수면상태 모두 개선되었다는 것.
혼자만의 생각에 방해 없이 잠길 수 있는 감사한 공간, 우리는 얼마나 감사히 여기고 활용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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